캄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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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경내에 올라왔다. 처음으로 눈앞에 보인것은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원래 탑돌이를 하는곳은 저렇게 줄이 쳐져있지 않다. 아마, 사월초파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것에 대비하기 위해 저렇게 미로처럼 구불구불 길을 만들어놓은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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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가까워지자 젊은 스님 네분이서 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덩덩 더더덩, 덩덩 더러러... 많은 사찰을 돌아다녀봤지만, 북 치는것은 처음이라... 무슨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스님들의 얼굴이 상당히 젊어보였는데 갓 불교전공을 하고 불가에 귀의한듯한 앳된 얼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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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을 다 치고나선 저렇게 종을 쳤는데 이것이 마지막 행사인듯 종치기를 마친후에 모두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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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해인사 대웅전이 보인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다. 대웅전이라고 안 적혀있고, 대적광전(大寂光殿) 이라고 적혀있다. 나중에 알았는데 해인사는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이 서있기 때문인것 같다. 왜 그런지
는 따로 조사를 해보지 않고 대적광전의 안내 표지를 보지 못해서 알지 못하였다.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는 수덕사 대웅전과는 다른멋이 있다. 상당히 안정감 있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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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하다가 다쳤을까, 아니면 저렇게 여 햏자 들을 쳐다보다 발을 헛디뎌 다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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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석등. 지금껏 탑에대해서만 많이 언급해왔는데 석등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보면, 석등은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燈)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아래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땅과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 넣었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이런 양식은 보통의 통일신라 시대때에 만들어진 석등에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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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3층석탑.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둥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5층으로 되어 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태도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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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 뒤켠으로 가야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다. 처음엔 일반인에게 공개 안되어있으면 어떻하나... 하고 정문에서 "일반인도 볼수 있습니까?" 물어보고, 다 올라와서 주차장 관리 아저씨에게도 물어봤었는데... 누구나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일본 우리나라 문화재도 꼭꼭 숨겨놔서 잘 공개하지 않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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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촬영할때 플래쉬를 터뜨릴 수 없다. 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유를 들면, "문화재가 손상되기때문에", "문화재는 지적재산권때문에 촬영해서 상업적으로 쓰일수 없기때문에" 등의 말들이 많은데... 정확히 따지자면 문화재가 손상되는것을 막기위해 문화재에 촬영을 금지하는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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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문화재들은 실내나 어떤 각에 씌워져 있는경우가 많다. 밖보다는 어둡기때문에 카메라로 촬영을 시도할때 주의하지 않으면 플래쉬가 터지게 된다.

바로. 광전효과때문이다. 이것은 고등학교 물리1 교과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빛을 금속에 쪼이면 금속에서 전자가 나오게 되고, 전자는 금속을 이온으로 만들게 되고, 금속은 쉽게 녹이슬게된다.

플래쉬의 빛은 전자파를 이용한 강한 빛이기 때문에 더더욱 문화재에 플래쉬를 터뜨리며 촬영하는것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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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디지탈 카메라 자체도 문화재를 썩힌다. 디지털 카메라 안에는 전하결합소자(CCD)라는 부품이 들어 있다. 이 부품은 렌즈를 통과한 빛을 전기 신호로 바꾸는 일종의 광(빛)센서다. CCD는 네모난 판처럼 되어 있고, 그 위에 수많은 광센서가 화소 수만큼 붙어 있다. 400만 화소라면 400만 개의 광센서가 CCD에 붙어 있다.

각각의 광센서 앞에는 컬러 필터가 붙어 있다. 빛의 삼원색인 빨강, 녹색, 파랑 필터다. 빨강 필터는 빨간 색 빛만 통과시키고, 이 빛이 광센서에 전달된다. 이때 광센서가 빛 알갱이를 전자로, 즉 빛을 전기 신호로 바꾼다. CCD에서는 광센서가 보낸 모든 전기 신호를 모아 사진 파일을 만든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아도 디지탈 카메라는 충분히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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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행에 있어서는 카메라가 없으면 안되기에... 그나마, 내 카메라가 DSLR 임을 자기 정당화 시키며, 위안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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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더 잘들게 하기위해 윗 창문의 너비와 아랫 창문의 너비가 각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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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습기가 올라오는것을 막기위해서. 또 바람이 쉽게 드나들게 하기위해 장경곽을 땅에서 떼어놓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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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체는 마치 한사람이 조각한듯 서체가 일정하고, 크기도 일정했으며, 그 하나 기울지 않고 정결하다. 이것을 단 몇년만에 조각했다는것이 미스테리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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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대대적인 수량파악을 했는가 보다. 장경에 검은 매직으로 슥슥 알파벳 "S" 라고 써 놓았다. 수량파악을 하기위해서 조사한 사람이라면 상당히 고고학에 견식이 있고 학계의 선구자가 진두지휘했을텐데 이렇게 A, B, C, D... 매직으로 써가며 파악을 했다니... 이 장경판을 새길때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기나 했을까. 아니면 자기 논문발표만 급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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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우측을 보면 장경판이 대충 포개져있다. 그 밑에는 땅으로 떨어질것 같기도 하다. 이마저도 고려시대때부터 그냥 저대로 냅뒀기때문일까, 아니면 대대적으로 수량을 파악하고 그 위치를 못 찾아 대충 껴놓은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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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각 맨 아래의 두개의 쥐구멍은 무엇입니까? 하고 관리하시는 아저씨께 물어봤다. 그 구멍들역시 바람의 통행을 위해 뚫어놓은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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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은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에 행여 비가 왔을때 빗물이 튀어 장경이 상할까 바닥을 파서 빗물길을 따로 내주었건만 조금만 더 잘 보관해주면 앞으로 1만년이 지나도 잘 보관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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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까래는 모르겠으나 기둥과 보는 그 옛날부터 그대로 내려오는것을 그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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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스티커로 장경을 헤아린 흔적. 나중에 복원하겠다고 스티커를 긁어대면 장경 상할것 같은데... 물을 댈수도 없고... 휘발유를 뿌릴수는 더욱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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